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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용공 조작 ‘오송회’…이광웅 시인 30주기
  • 정용하 기자
  • 등록 2022-12-23 13: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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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작가회의-교육문예창작회, 문학비 앞에서 추모식
  • 남성고·원광대 국문과 졸업, 2008년 재심에서 무죄 선고


5공 시절 대표적 용공 조작인 오송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던 익산출신 이광웅(사진 좌) 시인의 30주기 추모식이 금강하구둑 그의 문학비 앞에서 개최됐다.


이광웅(1940~1992) 시인이 세상을 떠나던 날도 눈이 많이 왔다고 한다. 추모식이 열리던 날 전북지역은 대설을 기록하며 곳곳이 교통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전북작가회의와 교육문예창작회는 지난 22일 군산 금강하구둑에 세워진 이광웅 시비 앞에서 이광웅 시인의 30주기 추모식을 개최했다.


이날 추모식에는 김근혜, 김성철, 김수예, 문신, 박태건, 복효근, 안준철, 이봉환, 정도상, 정동철, 정철성, 최기우, 한상준 등 문학인과 교사들이 참가했다. 추모식은 김자연 전북작가회의 회장 헌화로 시작했다.


이후 이광웅 시인의 육성으로 듣는 시 낭송, 김영춘, 진영심 시인의 추모 시 낭송, 유종화 시인의 추모 노래, 강형철, 신귀백, 김병용 작가에게 듣는 시인 이야기 등이 이어졌다. 이 시인이 근무한 군산제일고와 즐겨 찾던 곳, 잠들어 있던 군산교도소 옆 옛 무덤가 등을 둘러보며 이 시인을 기억하는 시간을 보냈다.


박태건 시인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기억해야 할 일을 적는다. 80년 광주학살 이후, 신군부의 공안 통치가 시작되었고 '이적 단체 결성' 등을 이유로 이광웅 시인을 비롯한 군산 제일고 교사들이 모진 고문을 받고 구속되었다”고 소개하며 “오장환의 시집 <병든 서울>을 제자에게 빌려 준 것이 죄였다”고 밝혔다. 


<오송회 사건>은 지난 2008년 재심으로 무죄가 선고되었으나, 이광웅은 세상을 떠난 뒤였다.


시인 이광웅(1940~1992)은 1940년 전북 이리(익산)에서 태어났다. 이리 남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재학 당시 교내 문학상인 ‘남성 문학상’ 소설 부문에 당선되어 문학적 관심을 받기도 했다. 


원광대학교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원광여종고, 군산제일고등학교 등에서 국어 교사로 재직했다. 1967년 ≪현대문학≫ 유치환의 추천, 1974년 ≪풀과 별≫ 신석정의 추천으로 시인으로 등단한다. 1982년 월북 시인의 작품을 읽었다는 이유로 전·현직 교사 9명이 구속된 이른바 ‘오송회’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다. 


이들은 20여 일의 모진 고문 끝에 ‘교사 간첩단’으로 둔갑 되었다. 주동 인물로 지목된 이광웅 시인은 7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87년 특별 사면으로 풀려난다. 이후 군산 서흥중학교에 복직되었으나 이듬해인 1989년 전교조에 가입하면서 다시 교단에서 밀려난다. 


1985년 첫 시집 ≪대밭≫을 시작으로 1989년 ‘목숨을 걸고’, 1992년 ‘수선화’를 출간하였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전북민족문학인협의회 창립에 앞장섰으며, 교육문예창작회 회장을 역임했다. 1992년 12월 22일 고문과 투옥 후유증으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이광웅 시인은 200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명예를 되찾는다. ‘오송회’ 사건 재심에서 광주고등법원이 관련자들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사건 피해자 및 가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낸다. 이에 대법원은 2011년 사건 피해자에 대한 국가 배상을 판결한다. 국가 권력의 부당한 폭력에 맞서 정의와 진실을 되찾은 양심의 값진 승리로 간주된다.


이광웅 시인의 시비(詩碑)에는 우리 시사(詩史)에 길이 남을 그의 대표작 <목숨을 걸고>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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