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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은 나의 문학적 고향이자 문학의 도시다”
  • 편집국 기자
  • 등록 2024-06-21 13:21:57
  • 수정 2024-06-21 14:3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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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원한 청년작가 박범신, ‘익산에서 나를 찾는구나’
  • 중앙동 책방에서 대화의 시간, 이리역의 추억 소개
  • 남성고 ‘비너스 클럽’과 이리고 ‘스파르타 클럽’ 추억

“내가 사랑하는 익산에서 오라고 해서 마음이 너무나 뿌듯했다. 익산에서 나를 찾는구나. 나의 문학적 자궁은 여기서 멀지 않은 강경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를 작가로 키운 곳은 익산이다. 익산은 나의 문학적 고향이라는 마음을 늘 갖고 있다.”


오랜만에 익산을 찾은 박범신 작가는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 ‘영원한 청년작가’로 불리는 박범신 작가가 지난 16일 낮 2시 중앙동 기찻길옆골목책방 2층에서 등단 51주년 맞이 출판기념회를 겸한 작가와의 대화 시간을 가졌다. 박 자가는 지난해 등단 50주년을 맞아 <두근거리는 고요>와 <순례> 두 권의 산문집을 냈다.


이날 박 작가는 “이리역에 오면 항상 그날 긴장됐던 20~30분간의 그림이 떠오른다”면서 남성고 2학년 때의 일화로 포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1963년 무렵, 남성고 유도부가 중심이 된 ‘비너스 클럽’과 이리고가 중심이 된 ‘스파르타 클럽’의 남학생 200여 명이 옛 이리역 시계탑 앞에서 팽팽하게 맞섰던 일이 있었다는 것. 


“창인동에 서 있는 손님을 끌어가려던 아주머니들, 몸 파는 처녀들, 노점상들 그리고 울근불근 매우 불안하지만 그러나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젊은 고등학생들, 또 긴장된 그런 분위기... 비너스와 스파르타가 전쟁 직전까지 충돌했던 그 가파른 순간의 이리역, 그것은 바로 1960년대의 우리 삶의 가파른 모습을 강력하게 반영하고 있다. 우리가 그런 것들을 끄집어내서 역사 속으로 간직하게 만들고 되돌아보게 만드는 게 현대문학의 커다란 하나의 흐름이란 말을 하고 싶다.”


그는 익산에는 한국전쟁이 터지고 나서 수많은 시인과 소설가들이 머물렀다고 했다. “그만큼 익산은 문학의 전통이 굉장히 강했고, 익산하면 그냥 문학의 도시다”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당시 충남 논산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익산군 황화면 봉동리다(1963년 충남으로 편입). 그의 아버지는 외아들을 멀리 강경중학교로 유학을 보냈는데, 교과서와 전과 말고는 다른 책이라곤 본 적 없던 그는 학교에 도서관이 생기면서 비로소 책다운 책을 펼칠 수 있었다. 매일 왕복 18km에 달하는 등굣길을 하루 4시간씩 오가야 했던 시절, 졸음을 참아가며 처음 빌려온 책을 몇 장 넘기던 그는 “너무나 강력하게” 그 책에 빠져들고 만다.


“잠이 싹 달아나고, 책을 끝까지 그대로 앉은 자세로 읽었다. 책의 마지막을 다 넘길 때는 책장이 눈물로 다 젖어 있었다. 책 한 권으로 인생이 완전히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런 경험은 다시 할 수가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돌아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는 그 책은 박인권 작가의 <쌍무지개 뜨는 언덕>이라는 소설이었다. 어쩌면 작가로서의 그의 삶은 그날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남성고로 진학해선 문학반 활동을 했는데, 연말이면 옛 광명예식장을 빌려 익산의 모든 학교 문학반 학생들이 함께 ‘문학의 밤’ 행사를 열곤 했다고 한다.


“익산은 그때 많은 시인이 있었고, 전국적으로 문인들이 그렇게 많이 살던 데가 없었다. 문학은 익산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기라성 같은 시인들이 와서 1년에 한 번 와서 앞자리에 쭉 앉아서 지켜봤다. 매우 문학적인 도시에서 성장했다고 말하고 싶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친구들은 거의 서울로 시험을 보러 갔지만 등록금이 없던 그는 매형의 도움으로 겨우 전주교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2년만 다니면 초등학교 교사로 밥벌이를 할 수 있었으니까. 그는 전주로 시험을 보러 가기 이틀 전 그의 하숙집을 찾아와서는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친구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그건 단지 그 친구의 이야기가 아니고, 그날 그 친구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였다. 그 친구가 되지 못한 내가 원망스럽고, 그 친구가 되지 못한 나를 죽이던 나날들이었다. 세계는 정상인데 나는 미친 것 같고 나는 정상인데 세계는 미친 것 같은 절대적인 내적 분열이 나의 10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교대를 나와 무주에서 2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그는 문학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남들보다 조금 늦게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편입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같은 과 후배였던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그는 대학시절이 “쓸쓸했다”고 말했다.


“학교 뒤에 초가집 몇 채 막걸릿집이 전부였다. 이른바 대학가였다. 막걸리 마시고 토하고 울고... 지금 생각하면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아마 많은 학생들이 어찌 보면 거기에서 인생의 깊은 맛을 제대로 배우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지금 환경이 부럽지는 않다. 어찌 보면 매우 문학적 기억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영원한 청년작가’라 불리는 그는 “여전히 내 내부는 너무나 젊은 것 같다”고 했다. 


“<은교>나 <더러운 책상>을 보면, 그 문장에 새긴 감수성은 여전히 면도날 같은 게 있다. 작두날 위에서 무당이 춤추는 것과 같다. 그런 것들은 문학 작가에게 강점일 수도 있지만, 작가에게는 개인으로서는 굉장히 고통스럽다. 늙으면 좀 늙어야 된다. 안정적으로 좀 늘 늙어야 되는데 안 늙는다. 맨날 이 정신이 어떤 위태로운 것들이 온다.”


그는 “내 소설이 훌륭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타고난 작가로 기억해주시고, 그리고 권위적인 작가가 아니라 예인으로서의 작가로 남기를 바란다”는 말로 이날 독자들과의 아쉬웠던 만남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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