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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이 한 장의 사진
  • 익산투데이
  • 등록 2019-11-20 10:33:00
  • 수정 2019-11-20 10:3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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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이 한 장의 사진

1970년대 전북기계공고 항공사진

 ▲ 1970년대 전북기계공업고등학교 항공사진./사진=신귀백(인산 민예총 대표, 영화평론가).   ⓒ익산투데이
▲ 1970년대 전북기계공업고등학교 항공사진./사진=신귀백(인산 민예총 대표, 영화평론가).   ⓒ익산투데이

 

1970년대에 찍은 전북기계공고의 항공사진이다.

 

지금은 빼곡하게 건물과 집이 있는 구도심 취급을 받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학교 주변에 논과 밭이 더 많았다.

생각해 보건대 익산시의 발전은 많은 사람들의 한숨과 눈물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 도시 발전의 계기는 일제의 미곡수탈 때문이었다. 작은 마을 솜리가 이리시, 그리고 익산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인들의 미곡 수탈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미곡수탈에 대해 김제시와 군산시만 주목하지만, 사실 익산이 일제 강점기 때 전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다는 것은 통계와 기록이 증명한다.

 

두 번째는 이리역 폭발사고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윤흥길 작가는 『소라단 가는 길』에서 “시가 비약적으로 발전허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시민들은 대충 두 가지로 보고 있지. 일차적 계기는 지난 쌍칠년도에 일어났던 이리역 화역 열차 폭발 사고여.”라고 작품 초반에 기록하였다.

이리역폭발사고는 이렇다 할 성장동력이 없던 익산시에 발전의 계기가 되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당시 희생자 가족들이 생존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익산시는 이리역 폭발사고를 거치며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전북기계공고 뒤편의 논에는 빼곡하게 건물이 들어섰고, 위 사진 건너편 영등동은 익산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동네로 발전했다. 하지만 위 사진 동네가 배경인 윤흥길 작가의 『소라단 가는 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구가 증가하고 고층 삘딩숲이 들어서고 재정규모가 커지는 게 반드시 발전만은 아닐 거야. 옛날 미개발 시절 고향도 별로 맘에 안 들었지만, 눈부시게 발전한 요즘 고향은 더군다나 맘에 안 들 것 같아서 걱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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