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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른 평야를 굽어보며 1,400년 익산을 지키다
  • 소효경
  • 등록 2014-04-01 16:37:00
  • 수정 2014-04-02 10:4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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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산에 남아있는 대표적인 산성 ‘미륵산성’과 ‘익산토성’

익산은 예로부터 금강과 만경강이 에돌아 흘러나가며 넓은 평야를 만들어낸 풍요로운 고장이었으며 큰 강과 지류가 흘러 수로를 이용할 수 있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지역적, 경제적 특징으로 넓은 평야가 있는 익산이지만 야트막한 산 곳곳에 산성을 쌓은 흔적이 남아 있으며 지금까지 미륵산성, 익산토성, 낭산산성, 금마도토성, 천호산성, 어래산성, 용화산성 등이 확인되고 있다.

 

 

 ▲    ⓒ익산투데이
▲미륵산성ⓒ익산투데이

 

◈전라북도기념물 제12호 ‘미륵산성’
1,400년의 풍파를 이겨내고 오롯이 서 있는 미륵사지 석탑을 감싸 안고 있는 미륵산은 익산 시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그 정상에 올라봤을 법한 산이다. 미륵산은 해발 약 430m의 낮은 산이지만 그 정상에 서면 북으로는 멀리 금강까지, 남으로는 만경강이 흘러가는 것을 조망할 수 있고 넓은 익산평야를 굽어볼 수 있다.


미륵산 정상에서 북쪽 자락으로 내려가다 보면 웅장한 규모의 산성을 만날 수 있으니 바로 미륵산성이다. 전라북도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는 미륵산성은 그 높이와 너비가 약 4m에 달하고 성곽의 총길이가 최대 1,822m에 이르고 있어 구불구불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성곽의 규모가 대단하다.


미륵산성이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설에는 기자 조선의 준왕이 남하해 세운 성이라 하기도 하고 백제 무왕 때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한 익산을 방비하기 위해 세운 성이라 보기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 의하면 미륵산성은 그 둘레가 3,900척이고 높이가 8척에 달하며 고조선의 준왕이 남하해 쌓았다고 되어 있다. 또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성일의 사위 김영조가 쓴 「등기준성(登箕準城)」에는 기준성에 오른 감회를 적고 있는데 그 기준성이 바로 미륵산성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기록과는 달리 미륵산성에서는 돌화살촉, 포석환 등의 유물이 발굴되고 금마저(金馬渚)가 찍힌 평기와편이 발견되어 삼국시대에 축조된 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할 때 마성(馬城)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마성이 바로 지금의 미륵산성(또는 용화산성)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    ⓒ익산투데이
▲ 익산토성   ⓒ익산투데이

 

 


◈익산 평야를 한 눈에~ ‘익산토성’
미륵산성과 함께 익산을 대표하는 산성으로 익산토성을 꼽을 수 있다. 오금산 정상에 위치한 테뫼식산성인 익산토성은 배후에 미륵산이 있으며 앞으로는 왕궁리 유적과 익산평야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익산토성은 지난 1980년과 1984년,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처음에는 토성으로 쌓았다가 이후 주요 부위를 석성으로 개축한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성 안에서는 백제말기와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토기조각이 많이 발견되어 백제 때 축조되어 오랫동안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익산토성은 오금산성, 보덕성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오금산성은 백제 무왕이 어린 시절 마를 캐면서 오금을 얻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토성 인근에는 서동생가터와 용샘, 마룡지, 쌍릉 등 백제 무왕의 흔적이 남아있기도 하다. 또 보덕성은 고구려 멸망 후 신라에 투항한 안승을 고구려왕이라 했다가 후에 보덕왕(報德王)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예전부터 성곽 또는 산성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도읍지를 지키는 가장 완벽한 수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만의 난을 피해 남하해 온 고조선의 준왕이 들어와 건마국을 세운 곳이자 백제 무왕이 세력 기반이 약한 부여를 떠나 나라의 중심을 옮기려 한 곳인 익산을 방비하기 위한 성이 필요했고 그래서 산성을 쌓아올렸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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