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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에 시민이 분노하지 않는다면…
  • 익산투데이
  • 등록 2015-12-17 14:04:00
  • 수정 2015-12-17 14: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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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경환 전주대 객원교수





이완용은 ‘을사오적(乙巳五賊)’ 중에서도 대표적인 매국노로 역사의 죄인임에 틀림없다. 우리 국민 누구도 이완용이 매국노가 아니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제 정신인지 의심 받을 수밖에 없다. 두말할 나위 없이 필자도 이완용은 매국노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1905년 대한제국 총리대신으로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에 도장을 찍음으로써 매국의 원흉이 되었고, 매국의 대가로 일본 제국으로부터 후작의 칭호를 받고 귀족이 되어 막대한 재산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독립협회 회장을 지낸 대표적인 개혁파 관료였고 오히려 당시로서는 드문 합리적인 근대인이었다. 그런 그의 개화된 사상이 그를 파국으로 내몰았다면 역설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개혁적 고위관리였던 그가 만일 자신이 늑약조약에 조인하게 되면 후세에 백성들과 역사가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력도 없었을까?


소장 사학자가 최근 펴낸 [이완용평전]을 읽고 나름대로 평가해 보았다.


이완용은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영어를 배운 다음 미국통 외교 관리가 되었고, 참찬관의 직책으로 미국 워싱턴에 있을 때, 그는 조선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되었고 그것들을 세심히 관찰했을 것이다.


1215년 런던 템스 강변에서 영국의 존(John)왕이 교회와 귀족들의 강압에 따라 날인한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는, 통치자와 피통치자 간의 약정으로 이후 수많은 역사적 변혁의 고비마다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법치의 원칙을 천명한 대장전으로서 미국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 퍼져 있는 정신적 규범이 되었고, 루소가 계몽사상의 선구자로서 왕권신수설에 도전하여 펴낸 [사회계약론]은,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으로 쳐들어가고 루이16세를 단두대에서 처단하게 한, 프랑스대혁명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또한 미국은 영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이 영국의 탄압에 맞서 조지 워싱턴을 중심으로 독립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아메리카 합중국이라는민주정부를 탄생시켰다. 이때 미국은 ‘더 이상 왕이나 여왕은 존재하지 않는다.(No more King, no more Queen)’고 선언했다. 이처럼 세계사의 흐름은 세습적 왕족 일가를 인정하지 않는 공화정 민주체제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미국에서 이를 체험한 명석한 대한제국의 교관 이완용의 머릿속에는 조선의 왕 고종을 이미 조선의 통치자로 인정할 수 없을 뿐더러 루이16세처럼 처단해야 할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조선은 1895년 을미사변에서 보듯 일본 제국 군인들과 일본 낭인들이 새벽 3시에 궁궐에 침입하여 국모인 명성황후를 칼로 난자하여 살해하고 석유를 뿌리고 불태워 연못에 버렸지만, 고종은 무서움에 떨며 충북 제천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더욱 한심한 것은, 조선 군대가 일본군의 졸개가 되어 궁궐 침입에 가세했고, 1,500여 명의 궁궐 경비병은 겁을 먹고 도망쳤다는 사실이다. 고종은 허수아비가 되었고, 조선은 주권 국가라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선 말기 부패의 한 가지 예를 들면, 고종에게 민 씨의 외척세력의 일원인 민영환이 자기의 친족인 서상욱을 군수로 임명해 주도록 부탁했지만, 5만원을 받고서야 전남 광양 군수로 발령 내 주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황성신문] 논설위원 한 달 봉급이 30원, 목수의 봉급은 24,6원이었으니 논설위원이 139년 모아야 하고, 목수는 169년 대패만 밀어야 할 돈이다. 더 말해 무엇하랴.


그 뿐인가, 과거 시험에서도 한양의 권세가에서 보낸 청탁 편지 한 장이나 시험 감독관의 수청 기생에게 주는 비단 한 필이면 급제했다.


이쯤 되면, 이완용에게 봉건왕조 조선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 나라라고 여겨졌을 것이며, 더구나 사회는 부패하고 군대는 나라를 지킬 힘이 없는 조선이 처한 엄연한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했을 것이다. 세계의 열강들 간에 힘의 균형이 깨어졌을 때 강대국은 약소국을 식민지배 통치한다는 사실도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강국이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에 식민지를 갖고 군림하며 통치하고 있는 현실에 조선을 비추어 보면서 조선의 운명을 조망해 보았으리라.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무능한 조선은 결국 일본의 지배를 피할 수 없다고 인식하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최대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취한 이완용을 현실주의자며, 실용주의자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 땅에 새롭게 전개될 강대국 일본에 의한 지배논리만을 지극히 현실적인 면으로만 생각하다 보니, 이완용에게 오천년을 이어온 자랑스런 역사와 순박한 백성들의 평가는 하찮게 여겨졌을 것이고, 따라서 을사늑약 조인은 역사의 순리처럼 당연하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조선 말기 유학자나 망명 지식인과 민초들까지 국가적 위기 앞에 분노하고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는 상황에서, 이완용은 조선이 처한 비참한 현실에 분노하거나 부끄러워 할 줄 몰랐다는 점에서는 전 국민과 역사 앞에 죄인임에 틀림이 없다.


근래 익산시의 승진비리 사건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세상 부패척결이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는 때에 이 무슨 자랑스럽지 못한 익산의 모습인가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끝으로 익산의 인사비리를 각종 부패 앞에 분노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완용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깊이 생각해 볼 명제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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