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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으로 떠나는 봄날 역사 여행
  • 익산투데이
  • 등록 2016-02-17 10: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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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산동헌·여산척화비·천주교성지 등 다양한 볼거리



한반도의 단전이자 호남 최초의 관문인 여산. 여산의 과거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여산은 그 지명처럼 농경시대에 유용한 숫돌이 많이 나는 산으로 불리었다. 선사시대(구석기)부터 취락이 형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 마한시대에는 여래비리국으로 백제시대에는 지량초현으로, 통일신라부터 여량현과 여산현으로 존재해왔다. 


고려시대에는 공양왕 3년(1391)에 감무를 두고 낭산과 공촌, 파제 두 부곡의 권농사까지 겸임하였고, 조선 태종 2년(1402)에 여산현이라 했다. 조선 세종 18년(1436)에는 원경왕후의 외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됐다. 조선조 고종 33년부터 여산군을 여산면으로 불러오게 되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적지로는 조선시대 말기 관아건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있는 여산동헌과 대원군이 세운 여산척화비, 천주교박해사건과 관련된 숲정이성지 등 여러 곳이 있다. 다가오는 따뜻한 봄날, 여산으로 역사여행을 떠나봄은 어떠할런지. 

 



■조선시대의 관아건물 여산동헌

여산동헌(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93호)은 조선시대 여산 고을의 수령이 업무를 보던 청사로 3단의 계단식 건물 터 제일 상단부에 들어서 있는데, 조선시대 말기에 건축한 것으로 보인다. 벽과 방의 구조는 근래 일부 개조하여 본 모습은 잃었지만,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특히 추녀와 대청마루에서 한식 목조 건물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다.


여산동헌은 전국적으로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옛 모습을 간직한 조선시대 지방관청 건물의 하나로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로 지붕의 옆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낮은 기단 위에 앞면과 왼쪽에는 약 90㎝ 높이의 둥근 주춧돌을 놓고 뒷면과 오른쪽은 경사지를 이용하여 낮은 주춧돌을 놓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를 짜지 않고 소박한 민도리로 처리하였으며, 앞뒤에 퇴칸을 두었다. 오른쪽 2칸은 온돌방이고 나머지는 대청마루로 되었으며, 온돌방이 있는 부분은 주춧돌이 높아 마룻바닥 밑으로 사람이 들어가 불을 땔 수 있도록 하였다.


 


■여산동헌의 느티나무

여산 동헌의 느티나무(전라북도 기념물 제116호)는 유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여산 동헌과 주변에 7주의 대형 느티나무가 집중 분포되어 있음에 따라 조선 태종대에서 세종대에 동헌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식재되었을 것으로 보여 수령은 6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나무의 흉고 둘레는 4.5m이고 높이는 22m이다.

  



■여산척화비 

여산척화비(익산시 향토유적 제7호)는 대원군이 병인양요(1866년) 때 척화의지를 발표하고 신미양요(1871년) 이후 백성들에게 서양에 대한 강한 항전의식을 심어주기 위하여 서울 종로를 비롯하여 동래, 부산진, 함양, 경주 등에 세운 것이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이 실각하자 일본공사관의 요구에 의하여 모두 철거되어 인근 땅에 묻었다가 1915년 이후에 발견되었다. 여산 척화비는 인근 초등학교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며 이를 현재의 여산동헌으로 이전하였다.


척화비는 비문이 선명한데 크기는 높이 114cm, 폭 46cm, 두께 9cm이고 재료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통비로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하자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여산 숲정이성지

여산은 호남의 관문으로 일찍이 천주교가 전래되어 수많은 신앙 공동체와 순교자들을 배출하였다.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당시에 금산, 진산, 고산에서 잡혀 온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며 기록상으로만 22명이 순교했다. “여산 순교 성지”라고 쓰인 대형 돌판이 있으며 그 안쪽으로 백지사 기념비가 서 있다. 순교자들의 무덤은 천호산 기슭 천호 공소 부근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변에 여산성지, 백지사지터 등이 있어 천주교 순례자들의 방문이 잇따르고 있다.




■여산 지역의 천주교 순교사건

이곳 여산 성지는 1868(무진)년 박해 때의 순교성지로 전주 교구 제2의 성지이다. 1866년 대원군의 쇄국 정책과 천주교 말살 정책으로 시작된 박해는 1868년에 이르러 가장 치열하였다. 당시 고산 넓은 바위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잡혀와 17명이 처형되었는데 그중에서 지도자인 김성첨(토마스)의 가족은 6명이 순교하였다.


이 순교자들은 숲정이와 장터에서 참수형 혹은 교수형으로 처형되었고 동헌(지금의 경노당) 뜰에서는 얼굴에 물을 뿌리고 백지를 겹겹이 덮어 질식시켜 죽이는 백지사(白紙死) 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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