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익산참여연대 회원, 이재성 한의원 원장)

많이 들어본 거 같은 데 딱히 잘 알지 못하는 병, 우울증이 있다. 우울증은 원인이 애매한 경우와 원인이 명확한 경우로 나뉜다. 두 명의 환자를 소개한다.
66세 남자 ‘일만’씨는 20대 초반에 돼지를 키웠다. 어느 겨울 돼지 막사에 불이 났고, 그 불로 일만 님이 우울증을 겪었다. 돼지 접고 논농사를 했다.

논농사로 자식들 대학까지 보내고 큰 탈 없이 살았다. 혼자 농사일 하는 동안에 늘 콧노래와 엷은 미소가 따랐다. 근데 두 달 전, 갑자기 아무 재미가 없어졌다. 밥맛이 떨어졌다. 농민에게 밥맛없다는 게 얼마나 드문 일인지 일 안해 본 사람은 모른다. 저녁에 잠이 잘 안 들었다. 그러고는 아침에 늦잠을 잤다.

농사지으려면 새벽 시원할 때 일해야 한다. 봄 농사 시작하는 게 왜 해야 하는 지 당쵀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사실 애들 대학 졸업 후에는 의미 찾고 일한 게 아니었다. 땅 놀리는 게 죄짓는 것이라 한 거였다.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옛날 일이고 최근 일이고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결국 올 농사는 소작 주기로 했다. 피곤했다. 피곤한 김에 보약 먹으면 나머지도 다 좋아질까 하고 한의원을 찾았다. 한의사가 질문하는 데 성의 없이 답한다. 한숨이 때때로 끼어든다. 큰 병이라고 먼저 진단을 자꾸 한다. 스스로 못난 사람이라고도 한다. 집은 잘 찾아가요? 예. 집 찾아가면 치매는 아니다.

원인이 애매한 우울증의 하나인 노인성 우울증이다. 노인성 우울증은 우울한 느낌이 없기도 한다. 그냥 재미만 없다. 젊은 날 우울증이 재발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의학은 원인 애매한 우울증을 백합병이라고 한다. 백합꽃 뿌리 먹으면 낫는다고 백합병이다. 백합 뿌리 캐보면 마늘같이 생겼다. 가을, 겨울에 캐서 줄기 버리고 쪄서 말린다. 하루 20그램 정도 달여서 물로 마시면 된다.

설사하는 사람이 먹으면 안 된다. 원인이 없으니 내 몸의 치료 기전을 작동시키는 방법을 쓴다. 뇌에는 ‘연민 공장’이라는 공장이 있다. 나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면 연민 공장이 가동한다. 그래서 정말로 내 안에서도 나를 애틋하게 대해준다. 없는 재미가 솟아나게 해준다. 돼지우리불로 망한 뒤에도 발로 벌어 애들 대학 다 보냈으니 애썼다고 스스로를 칭찬해주는 애틋함.. 하루 한 시간씩 이런 애틋함으로 사색하며 걸으면 놀라운 효과가 있다.

20세 재수생 ‘문과’님은 당연히 대학 갈 줄 알았다. 고등학교 3학년 모의고사 성적이 훌륭했다. 대학교 시험서 국어가 어렵게 나오는 바람에 몇 개를 틀렸다. 그래도 좀 낮추면 갈 거라 생각했는데 떨어졌다.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내가 재수를?!!! 재수 학원은 학교와 완전히 달랐다. 특히 문과는 전쟁이었다. 6월 쯤 되어 탈이 나기 시작했다. 잠자는 시간을 놓치면 밤새 공부를 했다. 새벽녘에 든 잠은 오전 넘어 깼다. 하루 종일 기분이 쳐져 있었다.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았다. 학원 수업 중에 웃긴 얘기를 해도 도무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했는데 잘 아는 선배가 재수 때 잘하다가 수능 망쳐서 안 좋은 대학 갔다는 얘기 듣고는 행동도 느려졌다. 엄마 아빠에게 죄송해요를 연발했다. 왜 죄송한가.. 몇 개월 지나 학원을 그만두었다.

원인 있는 우울증이다. 우울이 원래 한의학 병명이고, 원인 있는 우울증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憂)가 걱정, 울(鬱)이 해결 안됐다는 말이다. 걱정뿐 아니다. 분노도 오래가면 우울증 되고, 생각도 안 풀어지고 오래가면 우울증 된다. 깨달음으로 얼추 해결가능하다. 재수 삼수가 유행인 시대에 살고 있다는.. 문과가 없어져 가는 시대에 살고 있었다는..

그래서 이과와 다르게 한 문제 차이로 대학이 바뀐다는.. 그러니 절대 죄지은 거 없다는 거를 다시 한 번 확신하면 된다. 어깨 펴고 당당하게 살면 된다. 단방약으로 감초가 있다. 감초는 긴장을 풀어준다. 뚱뚱한 사람은 감초 오래먹으면 안 된다. 침놓고 전기 자극 주는 방법도 효과 좋다. 양약 아미트리플린 성분과 같은 치료효과가 있는 걸로 확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