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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한씨 종친회, “익산 쌍릉 우리 시조묘다”
  • 문명균 기자
  • 등록 2019-02-19 18:11:00
  • 수정 2019-02-19 18: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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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익산시청 정문서 땅 반환 등 요구
익산쌍릉, 청주한씨 시조 무강왕릉 주장
익산시장과 최완규 교수에 사죄 요구해

 ▲ 청주한씨 종친회(대표 한추태) 120여명이 19일 오후 1시 익산시청 정문에서 익산 쌍릉 대왕릉은 청주한씨 시조묘라 주장하며 집회를 가졌다.   ⓒ익산투데이
▲ 청주한씨 종친회(대표 한추태) 120여명이 19일 오후 1시 익산시청 정문에서 익산 쌍릉 대왕릉은 청주한씨 시조묘라 주장하며 집회를 가졌다.   ⓒ익산투데이

 

익산 쌍릉(대왕릉)의 주인공이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백제 무왕의 무덤이 확실시 된 마당에 청주 한씨 종친회가 익산쌍릉이 자신들의 시조묘라고 주장하고 나서 갈등 조장에 불을 지폈다.

 

청주한씨 종친회(대표 한추태) 120여명은 100만 종원들을 대표해 지난 19일 오후 1시 익산시청 정문에서 “익산 쌍릉 대왕릉은 청주한씨 시조인 마한태조 무강왕릉이다”며 청주 한씨로 땅 반환 등을 요구하는 집회를 가졌다.

 

청주한씨 종친회는 “고려사에 청주한씨 시조인 무강왕릉으로 기록된 익산 쌍릉을 익산시 등이 백제 무왕릉으로 일방적으로 추정발표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역사왜곡 조장하는 익산시는 쌍릉 역사 짜맞추기를 중지하고, 익산시장과 최완규 교수는 청주한씨 문중에 무릎 꿇고 사죄하라. 쌍릉 땅 취득경위와 승낙 없이 파헤친 이유를 소상히 밝히라”고 거듭 주장했다.

 

이에 앞서 청주 한씨 종친회 300여명은 이날 오전 11시 익산 쌍릉내 대왕릉에서 청주한씨 고유제를 지낸뒤 익산시청으로 이동했다.

 

한편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 4월 익산 쌍릉(대왕릉)에서 발견된 인골에서 남성노년층의 신체 특징과 병리학적 소견을 확인하고, 그동안 쌍릉 중 규모가 큰 대왕릉이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백제 무왕의 능묘라는 학설이 유력했는데 이번 인골분석으로 ‘쌍릉=백제 무왕설’에 무게를 둘 수 있게 됐다.

 

쌍릉의 존재는 고려사에서 처음 확인되며, 고려 충숙왕 때(1327년) 도굴되었다는 사건기록도 남아 있다. 당시부터 고조선 준왕이나 백제 무왕의 능이라는 설이 있었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8월부터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관리사업의 하나로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익산시와 공동으로 쌍릉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석실 끝부분에서 여태까지 그 존재가 알려진 바 없던 인골 조각이 담긴 나무상자를 발견했다. 100년 전 일제가 발굴하면서 다른 유물들은 유출했지만, 이는 꺼내 가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이 인골 자료가 무덤의 주인과 연결된다면, 백제 무왕의 능인지를 결정짓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고고학과 법의인류학, 유전학, 생화학, 암석학, 임산공학, 물리학 등 관련 전문가들을 모두 참여시켜 인골의 성별, 키, 식습관, 질환, 사망시점, 석실 석재의 산지, 목관재의 수종 등을 정밀 분석했다.

 

이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연구 결과 600년에 즉위하여 641년 사망했다는 무왕의 재임 기록으로 보아 10대나 20대에 즉위한 경우 무왕의 사망 나이가 남성 노년층으로 추정되는 쌍릉의 인골 추정 나이와 비슷하며, 사망 시점이 7세기 초반부터 중반 즈음이라는 인골 분석 결과는 익산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같은 시기에 왕권을 확립한 백제 무왕의 무덤이라는 역사적 가능성을 한 걸음 더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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