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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명당마을, 왕궁의 장암
  • 편집국 기자
  • 등록 2023-06-29 10: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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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채수훈(왕궁면장)

어느 읍․면이건 그 지역 중심 마을이 있다. 대체로 옛 향교나 관청이 자리한 마을이다. 그 지역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다. 왕궁면에는 13개 리 57개 마을이 있다. 광암리 장중은 법정리와 행정리의 첫 번째 마을이다. 장암(場岩)과 중리(中里)는 왕궁천 들녘을 사이에 두고 있다. 인구감소로 두 마을이 합해지면서 장중(場中)이 되었다. 우리는 역사에 묻힌 장암에 눈길을 돌려보고자 한다.


조선시대 겸암 유운용은 전주 지역을 둘러보고 북장암 남장대라 했다. 이 일대 최고 명당 두 군데를 일컫는 표현이다. 북장암은 왕궁의 장암마을을 가리킨다. 풍수지리로 볼 때 익산의 최고봉 천호산과 영산 용화산의 양대 산줄기가 시대산에서 만난다. 시대산 중턱의 기우제를 지내던 우제봉에서 광암리의 언덕을 따라 지맥이 뭉친 곳에 장암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은 산과 평야가 만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장암 뒤쪽은 언덕으로써 시대산과 잇닿아 있다. 아무래도 산에서 들판으로 내려가는 길목이라 산세가 부드러울 수밖에 없다. 그 언덕을 따라 대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러 처져 있다. 그 밑에 10여 호가 길쭉하게 형성돼 있다. 마을 앞쪽은 왕궁 들녘과 그 가운데로 왕궁천이 흐르고 있다. 그 들판 너머 중리에 한양과 전라도를 연결해 준 옛길 삼남대로가 지나고 있다.


장암(場岩)의 유래는 마당처럼 넓은 바위라 해서 마당바위라 하였다. 이 바위는 마을의 명물이다. 시대산에서 내려온 맥의 기운이 화룡점정을 찍고 있다. 일명 지네 혈이라고 해서 마당바위가 지네의 머리이고, 맞은편 앞산 달그메가 닭이어서 지네와 닭이 서로 마주 보는 형상이라고 한다. 마당바위는 장중교 앞 언덕에 마치 이마가 벗겨진 중년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바위 위쪽은 흙과 풀이 우거져 있다. 예전에는 널찍한 마당 같은 자리가 펼쳐져 있었다. 그 위에 올라가면 거대한 덩어리임을 알 수 있고, 그 크기를 맨눈으로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마을 전체가 마치 널따란 바위산에 올라앉아 있는 것 같다.     


마당바위는 어린이들이 왕궁천에서 물놀이하다가 바위에 올라가 몸의 물기를 말린 휴식처였다. 개구쟁이들이 뛰놀던 놀이터이기도 했다. 어른들은 가을 추수 때 고추, 보리, 콩 등을 바위 위에 널어놓고 자연 건조를 시켰다. 주민들에게 상징적인 공간이자 추억이 깃든 장소였다. 


마을 경로당의 뒤쪽 언덕에는 우주 황씨 문중에서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가 우뚝 솟아있다. 나무의 줄기 속에 대나무와 꾸지뽕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신비한 은행나무라고 불리고 있다. 주민들은 한 그루의 나무에서 세 종류의 나무가 함께 자라는 모습이 마을의 화합을 상징하는 나무라고 칭송한다. 그래서 그런지 주민들의 성품은 온화하고 집집이 화초를 가꾸어 놓아 여유롭게 느껴진다.


장암 일대는 넓은 바위가 많아서 광암리(廣岩里)라 했는데 거꾸로 지하수가 풍부했다. 그 전설을 말해주듯이 은행나무 아래쪽에는 한림학사를 지낸 황맹수와 인연이 있다고 전하는 한림샘의 흔적이 남아있다. 천호산 자락에서 흘러 내려온 골짜기 물들이 모여 왕궁천이 시작되는 첫 동네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자연히 윗마을의 장암은 왕궁평야를 적시는 왕궁천의 은혜로움을 먼저 받게 된 셈이다. 일찍이 농사가 발달하였다. 인걸은 지령이라 했던가. 풍수적인 입지와 풍요로운 들녘 때문에 일찍이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둥지를 틀었다.


장암에는 고려 초에 우주 황씨 시조 황민보부터 중시조이자 조선 개국공신 황거중이 낙향하여 거주하였다. 임진왜란 이후까지 약 5백여 년 동안 세거하였던 우주 황씨의 본향이다. 특히 임진왜란 때 이치전투에서 순국한 황박 의병장이 출생한 곳이기도 하다. 


전의이씨 7칸 고택과 그 터를 보면 그 규모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이 고택의 택호는 상춘재이다. 130년의 역사가 담긴 7칸 겹집이다. 호남에서는 보기 드문 고택의 반열에 올라가 있다. 이 고택 주변이 잔디밭으로 변했다. 예전에는 안채와 사랑채, 머슴 집과 곳간 등이 빼곡하게 들어찼었다고 한다. 넉넉한 천석꾼 살림집 규모라 짐작할 따름이다. 


장암이 명당이자 명문가 마을로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조선 때 표옹 송영구란 인물 때문이다. 우주 황씨의 딸이 진천 송씨 가문으로 시집을 갔다. 그러면서 송씨들의 가난했던 살림살이는 활짝 펴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에 왕궁 북쪽 땅은 진천 송씨 땅을 밟지 않고는 지나다닐 수 없었다. 이 가문을 대표하는 건축은 마을 중앙에 있는 정면 망모당((望慕堂)이다. 표옹이 작고한 아버지를 추모하며 지었는데 이 마을의 최고 명당이다. 편액은 명나라 문장가 주지번의 작품이다. 


망모당에 앉아 있으면 봉동읍 쪽의 안산인 봉실산이 보인다. 조용헌의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에 따르면 “대개 봉(鳳)자 지명이 들어가는 산은 여자 젖가슴처럼 둥그렇고, 그 위에는 젖꼭지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형태의 산이 많다.”라고 했다. 봉황의 머리를 여기에 비유한다고 하면서 전형적인 필봉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봉실산 오른쪽으로 산이 하나 더 붙어 있다. 그 모습은 마체(馬體)이다. 마체는 벼슬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망모당의 안산은 문필봉과 마체가 나란히 붙어 있는 형국이다”라며 예찬하였다.


이처럼 장암에는 두 명문가와 고택, 전라북도유형문화재 망모당, 신비한 은행나무, 조선시대 고속도로인 삼남대로, 왕궁천과 왕궁평야 그리고 풍수지리의 마당바위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문화,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며 살아 숨 쉬고 있다. 장암에는 재작년부터 양기신 이장과 주민들이 합심하여 마을만들기사업이 한창이다. 옛말에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통하여 새것을 배운다고 했다. 주민들이 겉멋보다 알차게 속살을 채워나가는 호남의 명당마을로 거듭 태어나길 빌어본다.



 






글쓴이 

채수훈<왕궁면 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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