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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과 이완용의 파묘 이야기
  • 편집국 기자
  • 등록 2024-04-12 12:47:18
  • 수정 2024-04-14 11: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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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파묘’로 본 이완용


영화 '파묘'의 스틸 컷영화 ‘파묘’의 열기가 식지 않은 채 꾸준히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오컬트(occult) 장르의 한국영화로는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하였고, 개봉 39일째인 4월 1일 현재 기준으로 1100만 명의 관객 동원과 1062억원의 매출 실적을 올렸다. 그뿐만 아니라 베트남, 태국, 호주, 중국 등에서도 흥행에 성공했고, 각종 해외 영화제로부터 초청을 받았다고 한다. 


양주 조씨의 관 뚜껑은 종걸 스님이 소장 중으로, 전북자치도 학예연구관인 김승대 박사가 제공한 사진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소재가 일제강점기에 친일 행각을 한 인물의 파묘(破墓)라는 점이, 그리고 극 중 인물들의 이름들이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차용했다는 점도 흥행 요소의 한 축이라는 생각이 든다. 1700만 관객을 동원한 ‘명량(Roaring Currents, 2014)’이나 1400만 관객을 동원한 ‘국제시장(Ode to My Father, 2014)’의 예처럼 10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려면 거의 모든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민족적 정서를 끌어낼 수 있어야 가능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 파묘 이전에 이미 파헤쳐진 이완용의 묘


폐묘되기 전 이완용의 묘

사람들 대부분은 이완용의 묘가 1979년에 폐묘(廢墓)된 줄 알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필자가 중학교 2학년생이었던 1978년 늦봄 즈음에 이완용의 묘는 이미 파헤쳐져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나의 짝꿍이었던 김OO라는 친구가 등교하자마자 책가방에서 연습장을 꺼내놓으며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그 연습장에는 한문(漢文)으로 된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는데, 동네 어른들이 시켜서 베껴온 것이라고 했다. 내 짝궁은 낭산면 북성마을에 살았는데 동네 사람들이 어떤 무덤을 이완용의 묘라고 하며 파헤친 뒤에 해골을 발로 차고 금니도 뽑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그 무덤이 정말 이완용의 묘가 맞는지 학교 선생님께 여쭤보라’며 관 뚜껑의 글씨를 베껴서 갖고 가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을 전주의 모처에 확인해보신 국사 선생님은 며칠 뒤에 이완용의 묘가 맞는 것 같다며 날을 잡아 전문가들과 방문하겠다고 하셨다. 


이완용의 묘가 있던 자리는 석재 채취로 현재는 허공이 되었다.

이런 과정을 볼 때 동네 사람들은 이완용의 묘가 거기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이완용의 허묘(虛墓)가 여러 곳에 조성되었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그 묘가 실제 이완용의 묘가 맞는지 확인해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장례식 당시의 신문 기사를 보면 이완용의 시신을 운구하기 위해 강경에서 낭산까지 길을 닦았다고 하므로, 이완용의 묘가 어디 있는지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완용의 묘는 매장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수난을 겪기 시작했다. 매장 후 2개월도 안 된 시점인 4월 16일에 산감(山監) 강태영(姜泰永) 씨가 거처하던 이완용의 묘막(墓幕)에 식칼과 곤봉으로 무장한 3인조 강도가 들이닥쳤고, 또 며칠 지나지 않아서 이완용의 묘를 파헤친 흔적이 있다는 산감(山監)의 신고가 들어왔다. 그 후부터는 이완용의 묘에 순사가 배치되었는데, 수사 결과 이완용의 묘를 파헤친 범인은 산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그 후로도 1932년과 1958년에 다시 이완용의 묘가 파헤쳐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 이완용이 익산 태생이라고?


우봉 이씨 족보의 이완용 관련 기록

언제부터인가 이완용이 여산 태생이라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말은 1984년 《학원》의 10월호 인터뷰에서 이병도(李丙燾, 1896~1989) 박사가 밝힌 견해였기 때문에 거의 공식적인 사실처럼 굳어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학자이자 실증사학(實證史學)의 비조(鼻祖)라고 일컫는 이병도 박사가 밝힌 견해였고, 더욱이 그는 본관이 우봉 이씨(牛峰 李氏)로 이완용의 조카라는 소문까지 돌았으므로 그의 견해를 신뢰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또한 그가 원광대학교에서 보관 중이던 이완용의 관 뚜껑을 가져가 불태운 일과, 이완용의 숙부 묘가 익산시 용안면의 성당포구에 있다는 사실도 이완용이 익산 태생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필자가 알기로는 익산시에는 우봉 이씨의 집성촌이 없고, 우봉 이씨 대종회의 홈페이지(http://www.woobonglee.com/)에서도 익산시 지역의 화수회(花樹會)는 찾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병도 박사가 이완용의 고향이 여산이라고 밝힌 것은 부안의 향토사학자 양OO 선생의 주장에 따른 것이라고 하므로 이병도 박사가 직접 확인한 사실이 아니었다. 



# 이완용과 익산의 인연


1899년 부안군에 세워졌던 이완용의 선정비는 현재 부안군 줄포면 행정복지센터 창고에 보관 중이다.

그렇다면 이완용은 왜 굳이 여산을 자신의 장지(葬地)로 선택했을까? 


이완용의 묘가 있던 지역의 행정구역 명칭은 현재 낭산면 낭산리이지만 이완용이 관찰사로 재직 중이던 대한제국 시기에는 여산군(礪山郡) 서삼면(西三面)에 속했다.


필자가 알기로 현재의 익산시 관할 지역과 관련된 문헌 기록이나 신문 보도 중에서 이완용의 행적과 직접 관련이 있는 내용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완용은 대한제국 시기인 1898년 3월에 전라북도 관찰사(全羅北道觀察使)로 임명된 후 ‘완산(完山)의 비문 서사관(碑文書寫官)’을 겸하면서 고종 황제의 관향(貫鄕)인 전주의 사적(史跡)들을 정비하였고, ‘전라북도 위유사(全羅北道慰諭使)’를 겸하면서 관할 지역의 재해를 입은 주민들을 보살피는 공을 세웠다. 특히 1898년 10월 17일의 속칭 ‘무술년 해일(戊戌年海溢)’로 큰 피해를 입은 부안 지역 주민들을 위한 구휼 사업을 벌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00년 7월에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죄목으로 파면되었다. 실록에는 백성들을 괴롭힌 내용이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여산에서 있었던 일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2004년에 이완용이 관찰사 재직 시절에 여산 김씨의 땅을 강탈했다는 증거가 적힌 문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완용이 다른 사람들의 땅을 강탈한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완용이 총리대신으로 재직 중이던 1909년에도 여산에 사는 윤경중(尹敬重)의 땅을 뺏으려고 하다가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윤경중이 경선궁(慶善宮: 순헌황귀비 엄씨의 거처)에 헌납하려던 여산의 300석지기 전답을 이완용이 손석기(孫錫基)라는 인물을 내세워 가로채려고 했던 것으로, 이완용이 법정에 증인으로 출두까지 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윤경중은 부영사관(副領事館, 6품직)을 지낸 관리 출신으로 애국계몽운동단체인 호남학회(湖南學會)의 총무까지 지낸 인물이었는데, 그런 유력 인사의 땅을 빼앗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무력한 일반 백성들의 땅을 빼앗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발생했을 시기의 여산군에는 주목할 만한 인물이 하나 있었다. 신소설 《혈의 누》의 작가이자 나중에 이완용의 비서가 된 이인직(李人稙, 1862~1916)이 여산군 주사(礪山郡主事)로 재직 중이었던 것이다. 이인직은 일본어를 할 줄 몰랐던 이완용을 대신해서 각종 중요한 문서들을 작성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최근에 발표된 어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인직은 단순히 이완용의 서류 작업만 했던 것이 아니고 한일합병의 추진을 적극적으로 권유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윤경중의 토지 강탈 사건이나 묘자리 준비에 이인직이 직접 개입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완용의 묘는 명당으로 이름난 옥금동과 성태봉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사실 이완용의 묘가 있던 곳은 명당으로 이름난 곳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완용의 묘가 있는 반대편 산기슭의 옥금동(玉琴洞)은 예로부터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의 명당이라고 알려져 있었고, 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여동생인 정부인 민씨(貞夫人 閔氏)를 처음 매장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고조선에서 남하한 기준왕(箕準王)이 왕자의 태를 묻었다고 하는 성태봉(聖胎峰)도 이완용의 묘가 있던 곳과 같은 산의 줄기에 있다. 


그래서일까, 이완용의 묘가 있던 북성마을 주변은 유난히 인재들을 많이 배출했다. 중앙직 1급 공무원인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을 역임한 진재관 박사가 북성마을 태생이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원특활비 상납 사건을 심리했던 진광철 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도 북성마을 태생이다. 박근혜 정권 때 장관급인 청년위원장을 지내고 프랑스의 국영사업인 5G사업을 수주한 남민우 다산그룹 회장은 북성마을과 바로 옆에 붙은 방교마을 태생이고, 군 서열 1위인 합참의장을 역임한 이남신 장군은 산 너머의 사월마을 태생이다. 특히 사월마을은 예비역 준장인 송병일 ㈜에스씨이 대표를 포함해 장군을 두 명이나 배출한 마을로, 조선 중기에 좌의정을 역임한 남이웅(南以雄 1575∼1648)의 부인 남평 조씨(南平 曺氏)가 병자호란 때 난을 피해 들어와 살았던 마을이기도 하다. 


그런 내력을 가진 마을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한때는 익산 과학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영재들의 부모들이 주민등록지를 이곳으로 옮기는 일이 간혹 있었다. 이런 내용들만 보면 이완용의 묘가 있던 곳은 어느 정도 명당의 조건을 갖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완용의 무덤은 마을 사람들에 의해 파묘되고, 시신이 관에서 꺼내어져 해골이 발길질을 당했으니, 명당은 자격을 갖춘 사람만이 그 주인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 이완용의 집에서 울려 퍼진 독립선언문


1872년 여산도호부 지도에 표기한 순화궁 장토와 이완용 묘

앞의 글에서 여산에 살던 윤경중이 경선궁(慶善宮)에 전답을 헌납하려고 했으나 이완용이 그 땅을 가로채려고 시도했다는 내용을 언급했다. 그런데 이완용의 무덤이 있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순화궁(順和宮)의 장토(莊土)가 있었다. 


순화궁은 인조 임금의 생모인 인헌왕후(仁獻王后, 추존 왕비)가 태어난 곳으로 세종 임금 이후 계속 능성 구씨(綾城具氏) 문중의 저택이었으나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시절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의 소유가 되었다. 그런데 헌종 임금의 후궁이었던 경빈 김씨(慶嬪 金氏)가 헌종 승하 후 이곳에 살게 되면서부터 순화궁(順和宮)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후 을사늑약(乙巳勒約) 때 이완용의 집이 성난 시위대에 의해 소실되자 거처를 잃은 이완용이 이곳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완용은 1913년에 2층 양옥집을 지어 이사하면서 이곳을 임대로 내주게 된다. 


헌종(憲宗)의 계비(繼妃) 효정왕후(孝定王后, 1831~1903) 남양홍씨(南陽洪氏)는 조부 홍기섭(洪耆燮, 1781~1866)의 임지였던 전라도 함열현에서 홍재룡(洪在龍, 1794~1863)의 장녀로 태어났다. 효정왕후가 간택된 후 홍재룡은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이 되었고 사후에 부친 홍기섭과 함께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919년 3월 1일,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태화관 별유천지 6호실에 모였다. ⓒ태화복지재단

이완용이 살던 순화궁은 1918년부터 궁중의 잔치와 음식을 다루는 전선사(典膳司) 장선(掌饍) 출신의 안순환(安淳煥, 1871~1942)이 사용하게 된다. 그가 궁궐에서 나와 개업한 고급 요릿집 명월관(明月館)이 1918년에 화재로 소실되자 순화궁을 명월관 대신 요릿집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순화궁을 요릿집으로 사용하면서부터는 건물 이름이 태화관(泰和館)으로 바뀌었는데, 처음 이름은 순화궁 경내에 있던 태화정(太和亭)의 이름과 같은 한자 표기를 사용한 태화관(太和館)이었다가 太華館을 거쳐서 泰和館이 되었다. 


그리고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이곳에 모여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글쓴이

최정호<익산근대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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