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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명동, 중앙동의 영광과 과제
  • 편집국 기자
  • 등록 2023-11-30 17:07:31
  • 수정 2023-12-01 09:5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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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익산 생활지도 ⓒ익산근대문화연구소

Ⅰ. 호남의 관문


 1. 익산 인지도

 익산은 명실상부한 호남지역 철도교통의 중심지다. KTX 익산역은 호남선 고속철도 SRT와 KTX가 항상 정차한다. 전주를 거쳐 여수까지 내려가는 전라선이 시작되고 천안에서부터 이어지는 장항선이 끝나는 역이다. 호남고속철도로 서울까지 1시간 20분, 제일 빠른 열차 편으로는 1시간 5분 만에 주파할 수 있게 되었다. 

인지도로 만경강과 금강 등 두 개의 강을 낀 도시로 미륵사지, 왕궁리 유적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말할 것 없고 한국의 자생종교인 원불교(삼성가의 종교로 유명)의 발원지, 원광대학교와 병원으로도 유명하다.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의 흑역사와 거친 남자들의 세상 그리고 성당포구와 교도소세트가 뜨고 있다. 부사관학교, 역전할머니맥주, 엘베강 등 20세기 건축의 집합소이자 레트로 감성을 가진 중앙동 자체가 주요한 자산이다. 


  2. 익산시 중앙동 유래

  1912년 호남선 개통을 계기로 이리역이 들어서면서 역 앞 공간이 도시로 발달하게 되었다. 1912년에 익산공립소학교(중앙초등학교)가 세워지고 1913년에는 익산공립보통학교(이리초등학교)와 1922년 이리공립농림학교 다음에 이리여고가 세워지게 되었다. 역 앞에는 명치여관을 비롯한 여관이 자리했으며 동쪽으로 각종 관공서와 도매점이 들어섰다. 창인동 일대에는 한때 중앙대학교 이리분교로 사용되었던 동양척식회사 이리지점(옛 중소기업익산지점), 토목국 이리출장소, 조선식산은행지점(현 스탠다드차타드 은행), 삼남은행(후일 상업은행) 등이 즐비했다. 우체국 건너 중앙국민학교를 중심으로 한 갈산동은 일본인의 집단 거주지로 개발되었다. 

  익산역 앞길 남쪽에 위치한 중앙로(일명 영정통)는 보통 이리극장에서부터 삼남극장 일대의 상업적 공간을 말하는데 익산 일백 년 역사 중 70~80년대에 가장 번화가였다. 각종 학교가 많아 학생들과 이리수출자유지역에 근무하는 젊은 사람들의 소비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이리의 북쪽인 황등과 함열 멀리는 강경지역, 남쪽으로는 김제와 정읍에 이르고, 동서로는 삼례와 대장촌 그리고 오산과 임피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와 소비공간으로 융성하였다. 역에서 가까운 공간에 시청과 군청 그리고 경찰서를 비롯한 행정기관과 은행 등 금융기관을 필두로 금은방과 식당 등 한 마디로 호남북부권역의 원스톱 서비스 공간이었다. 통합 당시 인구는 32만 8,152명이었는데, 2023년 10월 27만 546명 현재에 이른다. 


  3. 이리극장에서 삼남극장까지

  예나 지금이나 극장은 가장 좋은 상권 중심에 자리한다. 현재는 2004년 영등동 CGV 입점, 2019년 모현동에 롯데시네마가 개관하였다. 중앙동 구도심에 있던 극장들로는 이리극장은 1915년 이리좌(座)로 개창하였다. 이주일 하춘화의 미담을 가진 삼남극장은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리시의 문예회관 역할을 했던 시공관과 2본 동시상영하던 동성극장 그리고 작은 극장으로 코리아 극장 등이 있었다. 


  한편 배차장과 대전사거리를 중심으로 ‘태양의 집’과 ‘은영의 집’, ‘지구음악감상실’이 청춘의 공간이던 시절이 있었다. ‘무랑루즈’를 비롯한 스탠드바를 거느린 중앙동은 전주에서도 술 마시러 오는 물 좋은 곳이었다. 1980년대 이후를 풍미한 익산의 회관문화는 이리역 앞 제일은행 근처 골목에서 형성된 음식문화이다. 전성기의 회관은 한식은 물론이거니와 일식, 양식을 통합한 음식이 30여 가지가 넘게 나오는 식당이었다. 손님들은 고급스러운 사기그릇에 든 안주를 바탕으로 정종이나 맥주를 마셨다. 

  중앙동은 호남의 명동이었다. 시민들은 중앙동 금은방에서 결혼예물을 마련하고, 100여 개가 넘은 양장점에서 옷을 맞췄다. 전흥라사에서 옷감을 떼어 모니카 양장점, 남성테라에서 옷을 맞추고, 신한당과 중앙사에서 패물을 구입하면서 달나라 혹은 영빈예식장에서 음식을 나누며 새로운 삶을 축하해 주었다. 


Ⅱ. 중앙동 영화의 시기 


  1. 이리역 광장과 회관문화

  이리역 건너편에 살았던 아이들은 열차에서 떨어진 조개탄을 집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과 독일의 소설이나 영화에서 나오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과거 이리역 앞에서 시민들이 신문지를 깔고 맥주를 마시고, 기타를 치는 ‘해수욕장’ 못지않은 곳이었다. 

  생산지이자 소비공간인 상업도시로서의 이리의 상업권역이 강경, 서천을 넘어서 대천과 한산에 이른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원광대병원의 주 고객들이다. 70년대에는 집집마다 미싱 한 대씩을 들여놓기 위하여 엄마들은 계를 했고, 이들은 중앙동의 라사점에서 옷감을 떠서 양장점과 양복점으로 달려갔다. 익산은 통학생이 많은 도시답게 역 주위에 태권도를 비롯한 체육관이 많았다. 학생들은 양복점에서 교복과 교련복을 맞추고 모자점에서 명찰을 구입했다. 그리고 대한서림을 비롯한 서점은 이리시민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수학의 정석』이 많이 팔리고 원광대학교가 종합대학이 되면서, 이리는 교육도시로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이리역 폭발사고를 계기로 역 주변의 무질서했던 시가지를 정비하고, 1978년 새로운 기차역이 설립되고 도로가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이 상업적 공간은 조금씩 단절되기 시작한다. 동산동 및 신동 등이 개발되기 전 중앙시장 및 상가가 밀집하여 1990년대까지 익산시내 중심상권을 형성했지만 1995년 도농통합 후 익산의 발전 축이 익산군과 톨게이트 중심축인 원광대 상권과 영등동 부송동 방면으로 익산시 동쪽으로 개발되면서 침체기를 맞고 있다. 


  2. 중앙동 전성시대의 구술 인터뷰

  1) 중앙동 자체가 백화점이야(드레스미싱, 조 00)

  처음에는 이리 사람들이 미싱을 샀고, 다음에는 이제 외부인들이 미싱을 사러 왔어요. 강경, 채운 그리고 서천에서도 왔어요. 이리의 미싱 시장권이 대천까지야. 그때 당시 이리가 교통의 중심이고, 상권의 중심이고, 교육의 중심지였어요. 그러니 그때가 중앙동이 제일 성할 때야. 중앙동 자체가 백화점이야. 오면 옷도 다 맞춰 입어, 먹을 것도 먹어, 술도 먹어, 기계도 사. 중앙동이 종합백화점이야.


  2) 계모임과 회관문화의 산실 중앙동(실비회관, 현00)

회관이 1971년도, 72년도 즈음 생깁니다. 실비회관이라는 것은 그냥 용어만, 상호만 회관이라고 지은 거지요. 근데 유행이 있잖아요? 회관이라는 이름의 시조가, 익산뿐만 아니라 전국의 회관이라는 이름의 시조이죠. 실비회관이 익산에서는 회관 1호인데 회관은 규모가 큰 식당을 의미하게 되었죠. 회관이 하나하나 생겨서 ‘회관골목’이라는 통칭이 붙었어요. 실비회관은 93년까지 있었어요. 중앙동이 어느 정도 정점을 찍고, 내려가기 시작할 무렵인데…. 그때부터 영등동 때문에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죠.

 

  3) 양장점의 시대(00패션 강00)

   제일 큰 의상실이 모니카였고, 그다음이 현대였죠. 그다음이 피카디리, 아네모네였어요. 하여간 한 집 건너 의상실이 있었어요. 그때가 1975년 정도인데 당시 이리 시내에 의상실이 102개였어요. 하여튼 뭐 차렸다 하면 의상실이었어요. 토-일요일에는 함열 돌공장 사모님, 원대 앞에서 하숙치는 아줌마들이 많이 왔는데 옷을 많이 사러 왔었어요. 강경, 함열, 논산에서도 오고….  그때는 남성양복점, 남송양복점, 창성양복점점, 지큐테라, 한성테라…. 아무튼 예전에는 의상실이 많으니까 의상협회가 있었어요. 사실 SS패션, 그분들도 처음에는 양복점을 했지. 그리고 반도, 코오롱 같은 기성복들이 생겨날 때 기성복 점으로 갈아탔지. 


  4) 금은방 전성기(00당, 강00)

  한창 전성기 때는 중앙동에 금은방이 많이 있었어. 중앙로 양쪽 골목부터 저쪽까지 다 금은방이었어. 그때 있었던 가게들이 중앙사, 황해사, 천보당, 천인당, 한일당이었지. 옛날에는 가게 이름을 ‘당’으로 많이 했지. 그리고 신광당, 정금당, 신한당, 보옥당도 있었다. 제일 잘 된 데는 옛날에는 중앙사였지, 제일 컸지. 그리고 황해사도 잘 됐지. 예전에 중앙시장 사람들도 우리 가게에 많이 왔지. 옛날 중앙시장 사람들이 생선장사하고 채소장사 하는 사람들 중 목걸이에 팔찌 안 찬 사람들이 없었어. 옛날에 중앙시장 사람들이 계를 많이 했어. 옛날에는 시장도 장사 잘됐으니까.


 

Ⅲ. ‘치킨 로드’ 설치의 맥락

 

  치킨(chicken)은 프라이드치킨의 줄임말로 닭튀김의 일종으로, 토막난 닭고기에 양념을 한 뒤 밀가루나 전분 등을 묻히고 끓는 기름에 튀긴 요리이다. ‘치맥(치킨+맥주) 페스티벌’이란 깃발이 흔하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통닭의 시대는 전기구이에서 후라이드로 바뀐다. 이후 양념통닭의 등장으로 다양한 닭튀김 요리가 등장하고 생맥주집도 호황을 누리면서 치맥의 시대를 암시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프랜차이즈가 대세를 이루게 된다. 치킨에 맥주 마시는 모습이 아시아 각국에 퍼졌고 ‘K치킨’은 일약 유명해졌다. 2002월드컵의 지정한 승자는 치킨집이다. 2022년 말 기준 치킨집은 8만 1,000여 개가 운영되고 있다. 

  프랑스 축구팀의 상징으로 닭은 생활 속의 용감함의 상징이라 한다. 라틴어의 Gallus라는 단어가 골족을 의미하는 gaulois, 수탉을 의미하는 Coq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예수를 세 번 부정한 것 그리고 서양 풍향계의 모형 등 닭은 매우 친숙한 편인데 우리나라는 닭x가리 등 별로 좋지 않은 표현을 하는 편이다. 


  1) 일제강점기 일본인 이마무라(今村)가 대장촌에서 부화기계를 통한 병아리의 철도를 이용한 반출하였다.

  2) 익산에서 성장한 치킨 브랜드

  가. 다사랑치킨 : 원래는 다사랑 치킨피자이다. 1993년 익산시를 거점으로 시작된 치킨 브랜드. 본점은 원광대학교 근처 대학로에 있다. 서울에는 합정점, 경기도에는 매탄점, 시흥정왕점, 밴쿠버에도 지점이 있다 한다. 치킨의 튀김옷이 두텁지 않은 편이며, 매운맛이 강하면서도 감칠맛이 있는 편. 일반 후라이드가 솜리치킨이고 양념치킨은 솜리닭강정이다. 시킬 땐 그냥 솜리, 양념, 반반으로 구별해서 주문하면 된다. 또한 살떨리게 매운 火살치킨도 있다. 

  나. 솜리치킨: 익산에서 시작한 치킨 체인점으로 시골 재래시장에 가면 튀겨주는 닭튀김으로 시작했다. 가마솥에 기름을 가득 부어 닭을 튀겨낸다. 고열에서 튀겨 굉장히 바삭하다. 치킨 튀김옷에 카레 풍미가 나고 깨가 들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 햇살치킨: 호남지역 치킨 브랜드다. 수도권 상륙에 성공 이후 많은 매장이 준비 중이다. 최근에는 자메이카 오후치킨과 자메이카 오븐치킨, 오븐블랙 바베큐 등 신메뉴를 출시했다. 


  3) 하림의 성공신화

  하림은 대한민국의 육계 전문기업. 육계 농장에서 출발하여 현재는 육계를 가공공장, 유통까지 취급하고 있다. 한국 닭고기 전문기업의 대명사로 현재 600여 사육농가로 부터 연간 1억 마리의 육계를 공급받고 있다. 2020년대 재계서열 20위권에 이르는 대기업이다.

  김흥국의 성공신화 : 11살인 초등학교 4학년 때 외할머니로부터 10마리의 병아리들을 선물 받아서 키운다. 그 병아리 10마리로 시작해 18세에 닭 5,000마리, 돼지 700마리 농장이 되었으며 그렇게 이리농림고등학교 재학 중 사업자 등록도 했고, 양계사업을 비롯한 축산사업을 시작한다. 

  201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각모를 경매에서 당시 기준 약 26억원에 낙찰, 나폴레옹이 패전 직전의 위기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둔 마렝고 전투에서 썼던 이각모이다. 실제로 판교 테크노밸리 하림그룹 계열사, NS홈쇼핑 별관 1층 판교 나폴레옹 갤러리에 전시 중이다. 가져오자. 


  4. 이웃 도시의 예

  1) 후쿠오카와 하카다(博多): 인구 23만 후쿠오카시의 동쪽에 위치한 구이며, 후쿠오카(福岡)현청이 소재한 곳이기도 하다. 하카다(博多)역은 산요 신칸센의 종점이자 큐슈 신칸센의 출발역으로, 교통의 요지이다. 돈코츠 라멘과 명란젓이 유명하다. 

  2) 군산은 영화와 음식을 바탕으로 레트로 감성을 작극한 시간여행이란 테마로 도심공동화를 극복하고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 <타짜>에서 고니가 평경장에게 화투를 배우던 곳 아닌가? 경암동 철길마을은 백지영 '사랑 안 해'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떴다. 복성루, 빈해원 등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3) 수원 3대 통닭은 진미통닭, 용성통닭, 남문통닭: 밥과 함께 먹는 통닭? 왕갈비 양념 소스는 맛이 너무 진해서 몇 조각 먹으니 금방 물렸고 후라이드 튀김은 바삭바삭한 느낌보다 가마솥에 쪄낸 맛인데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자리를 잡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4) 정읍의 쌍화탕 거리 


 Ⅳ. ‘치킨 로드’ 성공을 위한 제언

 

  중앙동은 이리시를 중심으로 호남 북부권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행정 경제 원스톱 서비스 공간이었다. 김제나 함열 등 금융권 지점이 없는 경우 이리에 나와서 은행업무를 보아야 했다. 1995년 도농통합 이후 영등동 일대 개발에 따른 익산역 주변 중앙동의 상권이 슬럼화되기 시작한다. 

  섬유, 석가공, 보석산업의 사양길로 호남 철도교통의 관문인 익산역 주변 중앙동의 인구는 감소하고 있다. 한마디로 통닭집이 없는 거리로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도심공동화 현상과 공실 상가 증가로 상권 위축되고 있다. 참 어려운 시점에 도시재생뉴딜사업 일환으로 닭특화거리를 조성하고자 소상공인 창업교육을 통하여 창업지원과 문화관광 연계 및 지역경제 활성화 대책 마련 필요해서 치킨로드 시대를 열고자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익산은 전국 지자체 5위 농지면적, 국가식품클러스터 식품 대기업 하림(주)의 어시스트 등 6차 식품산업 기반 활용한 음식특화거리 조성 등 말의 성찬 지점에 몇 가지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 치킨박물관을 설립하자. 강릉에는 화폐전시관 설립되었다. 사임당과 율곡이라는 맥락이다. 요코하마에는 컵라면 박물관이 있다. 사람들은 거기서 나만의 컵라면 만들기를 시행한다. 국내에서 마니커 닭 박물관이 경기도 동두천시에 있다. 닭에 대한 그림과 소품 등을 전시하는 정도이고 경기도 이천시에는 치킨대학이 있는데 BBQ 작품이다. 그렇다면 익산에 치킨박물관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림과 익산에서 시작된 치킨 브랜드 등 맥락은 충분하다. 하림이 익산이 본거지라면 나폴레옹 모자를 전시할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둘째, 드라마와 영화제작에 ppl로 접근 그리고 최원준 같은 PBA 챔피언 당구선수에게 치킨로드 상표를 붙이자, ‘치킨 로드’ 자체가 상품이 되어야 한다.

  셋째, ‘치킨 로드’ 거리에 주차장과 최고의 화장실 시설 등이 완성되지 않고는 손님이 가지 않는다.

  넷째, 맛과 정성이 중요할 것이다. 치킨집은 매년 수천 개 문 닫는 ‘자영업자의 무덤’으로도 불린다. 절실함이 성공으로 이끈다.

  백년손님 아니라도 누구나 치킨을 먹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인맥보다 치맥’, ‘치느님’이란 표현이 있다. 오늘도 바삭한 두세 조각을 먹으려 치킨을 시키고 이만 원에 신문지만 깔면 된다. BBQ나 교촌도 좋지만 바삭거리는 깨통닭, 솜리치킨과 유성통닭이 훨씬 개운하다. 중앙동이 치킨의 성지로 거듭나는 날, 프랜차이즈를 이기는 대한민국의 ‘치킨 로드’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글쓴이

신귀백(익산근대문화연구소장)

문학박사. 익산근대문화연구소장. <영화사용법> 평론집을 내었고 다큐멘터리 <미안해 전해줘> 감독을 했다. <전주편애>, <이리역의 까마귀떼> 같은 인문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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