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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라, 중앙시장
  • 편집국 기자
  • 등록 2023-12-05 10:3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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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도심(중앙동) 치킨로드 조성사업 기획연재(5)

  소싯적 엄마와의 추억을 한 가지 꼽는다면 시장보기이다. 기억은 1970년 초 초등학교 다니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익산군 황등 무동마을 시골집에서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버스정류장이 있는 신성 마을까지 600m쯤 걸어가야 했다. 당시 버스 안내양은 예쁜 아가씨였고 버스요금은 이삼십 원 했던 것 같다. 아마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는 공짜였을 것이다. 그곳에서 황등 삼거리까지 십 리 거리였고 비포장 농로였다. 뒤에 앉으면 길이 좋지 않아 뒷바퀴가 덜컹거려 대부분 앞쪽에 엄마의 무릎에 앉아서 갔다. 거기서부터 시내까지는 국도 23호 포장길이었다. 

  황등면 소재지에도 오일장이 제법 크게 열렸다. 엄마는 황등장보다 주로 상설시장인 이리시 중앙시장을 즐겨 찾았다. 어린 마음에 버스도 타보고 시내 구경할 수도 있어서 시장에 갈 때면 강아지가 꼬리를 치듯 엄마 뒤를 기분 좋게 따라다녔었다. 엄마한테 자녀라 해 봤자 무녀독남 혼자여서 더욱 애지중지하며 어디든 자주 데리고 다니셨던 것 같다. 버스가 황등평야 제방을 가로질러 갈 때는 1차로 양쪽으로 플라타너스가 원광대학교까지 숲 터널을 이루었다. 삼양라면 공장 옆을 지나서 이리공업고등학교, 이리고등학교 그리고 이리여자고등학교 옆을 지나 대전사거리에서 우측으로 꺾어 들어가면 중앙시장 쪽으로 접어들었다. 

  시장에 들어서면 사고파는 사람들로 붐비고 왁자지껄하였다. 엄마는 평소 다니시던 단골집이 있었다. 엄마가 중앙시장에 자주 오는 것은 지손(支孫) 집안의 며느리로서 연례적인 제사, 설․ 추석 명절, 반찬거리 장보기와 할아버지 삼 형제 집안 또는 동네 잔심부름도 끼어있었다. 시장 출입은 잦았고 엄마는 뜨내기손님이 아닌 단골로서 귀한 대접을 받았다. 상인들은 엄마 옆에 딱 붙어 있는 어린 꼬마를 보면 의례적으로 키 크고 잘생겼다며 칭찬해주었다. 어린 맘에 쑥스러우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며 기분이 좋았었다. 시장에는 의례 도넛, 어묵, 붕어빵 가게 등이 있었는데 엄마는 그 앞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꼭 무언가를 사 주셨다. 내가 시장에 가는 가장 큰 즐거운 이유였다. 

  엄마는 명절을 앞두면 옷과 신발을 사주었다. 초등학교 동창회에 가면 친구들이 어릴 적 옷을 잘 입어 귀공자 같았다고 했었는데 그 이유가 다 있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엄마는 결혼하기 전까지 시내 의류점에 데리고 가서 옷을 사 주셨다. 어머니가 사주시는 옷만 입어서 그런지 제철에 맞는 옷을 잘 고르거나 흥정할 줄 몰랐다. 결혼 후엔 자연스럽게 아내에게 이어져 지금도 옷 사러 가면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아내 뒤만 따라다닌다.      

  당시 버스터미널은 현 이진탁피부과의원 자리에 있었다. 집에 가는 버스를 타러 갈 때는 엄마의 양손은 한 짐이었고, 나 또한 작은 장바구니를 들고 낑낑거리며 졸래졸래 뒤를 따랐다. 당시 시내버스는 한 대밖에 다니지 않아 우리를 시장에 내려준 버스가 다시 신성리까지 갔다가 돌아왔을 때 버스를 타야만 했다. 그 사이가 두 시간여 넘게 걸렸으니까 장보기엔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단순한 장보기가 아닌 다른 볼일이 있거나 구시장까지 갈 때는 어쩔 수 없이 그다음 버스를 타야만 했다. 지금 중앙동이라 해야 손바닥만 하지만 마을에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사방팔방이 산과 들로 둘러싸인 농촌에 비하면 이리 시내는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엄마와 중앙시장 장보기는 초등학교 때까지 이어졌다. 평일에는 학교 때문에 휴일과 방학 때에 가끔 따라나섰다. 겨울에는 손이 시리고 춥기도 했지만, 시내 구경을 할 수 있어서 그런지 설렘이 앞섰다. 중․고등학교 때는 시내에서 학교에 다녀 따라다니지 못했다. 다 큰 사내가 엄마 따라 시장에 다닌다며 놀림을 당했거나 아니면 심부름을 잘한다며 칭찬을 듣지 않았을까 싶다. 

  그 후 중앙시장은 잊힌 거리가 되었다. 1986년에 원광대학교에 다니며 중앙시장 옆 중앙동 거리에 자주 다녔다. 이 거리는 당시 서울의 명동이라 불릴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리 시내 유동 인구가 하루 5만명 야간에 3만명 대라 했는데 지금 중앙동 인구는 3천명을 겨우 턱걸이 중이다. 삼남극장 앞 건물 지하에 위치한 강경식당에 자주 모여 소주와 막걸리를 마시며 시국 토론을 벌였다. 대한서림은 책보며 기다리기 좋은 약속 장소였다. 다방과 당구장, 영화관과 나이트클럽 등으로 친구들과 자주 어울려 다녔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경기가 좋아 중앙동 거리와 시장은 어릴 때보다 더 복작거렸다. 1990년대에 영등동과 부송동에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구도심의 상권은 자연스럽게 이동하였다. 또한 2000년 후반 모현동택지개발사업 때문에 구도심의 공동화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 뒤 급격히 상권이 쇠퇴하였고 사람들의 발길이 점차 끊겨갔다. 그나마 도심 한복판을 관통하는 익산역이 중앙동에 있어서 역 주변에만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 같다.

  어린 시절 중앙시장의 단골손님이었던 엄마는 어느새 팔순이 되었고 이제는 북부시장으로 다니신다. 상점 주인들도 돌아가시거나 하나둘 어디론지 떠나갔다. 역 앞 시계탑과 대한서점에서 약속하며 기다리거나 어깨동무하며 중앙동 거리를 누비던 친구들도 생활 터전을 찾아 객지로 떠났다. 중앙동 옛 건물과 거리는 그대로이다. 중앙시장의 1층은 한낮에도 손님보다 가게 주인들이 더 많고 엄마와 손잡고 오르락내리락했던 2층은 텅 빈 채 스산해졌다. 당시 영화로웠던 모습은 흑백필름처럼 희미해져 가고 있다. 꼬마 때부터 30대까지 내 집 마당처럼 즐겨 찾았던 중앙동. 이제 50대 중년의 추억 속의 필름으로 남게 되었다. 

  요즘 들어 구도심 치킨로드 조성사업 때문에 중앙시장과 중앙동을 자주 찾고 있다. 그때 당시 이리역 시계탑이 없어지고 옛사람들이 어디론가 떠나갔지만, ‘기억하라 1970・80년 중앙동’이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그 시절을 회고하며 미래 중앙동의 희망 끈을 찾고자 거리를 서성여 본다. 


글쓴이

채수훈(익산시 위생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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