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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사 저자 오지영, 익산에 교도 2만 천도교를 뿌리내리다
  • 편집국 기자
  • 등록 2022-08-18 14:44:52
  • 수정 2022-08-18 15: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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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注: 갑오동학혁명 연구자라면 모두가 기억할 인물이 『동학사』를 쓴 오지영이다. 그의 익산에서의 삶과 의미를 밝힌다.

 

1926년 교도 2만이 넘는 익산 천도교와 ‘오지영


                                                               《동아일보》 1926년 7월 16일자 4면 


1926년 7월 16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익산지방대관(2)〉에는 당시 익산의 종교지형도가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기독교 다음으로 익산에서 세력이 큰 종교는) 천도교다. 4~5년 전까지는 제1세력이었다. 익산군이 전북 천도교의 총본영이 되어 총 교인의 숫자가 2만여 명을 넘었으며, 이리(裡里)에 수만 원의 거액을 투자하여 굉장한 회당을 건축하고, 한참 당시는 위풍이 서릿발치듯 하였다. 그러나 신구파 싸움 통에 교도들은 이산 또는 분립하여 옛날을 생각하면 오직 감개무량할 따름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1920년대 초에 익산에서 가장 큰 종교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은 개신교도 아니고 천주교도 아닌 천도교였다. 그리고 그 중심은 ‘이리’였다. 이 해에 나온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의하면, 당시의 익산 인구는 12만 7,945명인데, 이 중 2만여 명이 천도교인이었다고 한다(이명진・원도연, 「1920년대 익산지역의 사회주의자와 그 활동」 참조). 


그러나 이때는 이미 신구파의 분열로 교세가 기독교에 밀리기 시작했을 때이다. 따라서 그 이전에는 천도교 인구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익산에는 이렇게 거대한 천도교 세력이 형성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익산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리고 그 세력이 약화된 구체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지영’이라는 인물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동학사 저자 오지영 처가 익산에 오다


원암 오지영. 출처: 《천도교회월보》 제34호, 1913년 5월호


원암 오지영(吳知泳, 1868~1950)은 한국사에서는 『동학사(東學史)』의 저자로 저명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익산에서의 활동이나 천도교 사상가로서의 면모는 여전히 생소하다. 선행연구에 의하면, 오지영은 전북 고창군 무장현 출신으로, 14세(1882년) 때 『통감』과 『사서(四書)』를, 15세(1883년) 때 『시경』과 『서경』을 떼고, 한시(漢詩)를 짓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는 유학(儒學)과 한학에 상당한 소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23세 때인 1891년에 동학에 입도하였고, 이듬해인 1892년(임진년)에 무장현에서 일어난 ‘석불비결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탈출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처가가 있는 익산으로 이주한 뒤, 20여 년 동안 익산에서 줄곧 살았다. 


오지영이 익산에 온 1892년에 ‘익산민란’이 일어났는데, 이때 ‘도상두(都狀頭)’로 활약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94년에 전북 정읍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익산군에 설치된 집강소의 ‘중견’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오지영의 활약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1905년에 천도교가 창건되면서부터이다. 


1907년에 ‘원암(源庵)’이라는 천도교 도호(道號)를 받고 익산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1909년에는 천도교를 창건한 손병희가 삼남 지방을 순행할 때 그를 수행하였다. 마침내 1911년에 천도교 중앙총부의 핵심 간부로 임명되어 서울로 거주지를 옮겼다(이상, 노용필의 『『동학사』와 집강소 연구』 참조). 


따라서 그가 익산에 적을 두면서 활동한 시기는 1892년부터 1911년까지 약 20년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고(1894년) 천도교가 창건되었으며(1905년) 천도교 교리를 다루는 『천도교회월보』가 창간되었다(1910년. 이하 ‘『월보』’로 약칭). 동학과 천도교에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시기를 오지영은 익산에서 보낸 셈이다. 

 


오지영 첫 사용 순한글 ‘한울님’ 정착하다


                                   『동학사』 본문. 출처: 동학농민혁명 종합지식정보시스템


오지영과 관련해서 지금까지 거의 연구되지 않은 분야는 천도교 교리에 끼친 그의 영향이다. 1910년 8월에 『월보』가 창간되었는데, 이때부터 1922년 2월까지 23년 동안 오지영은 매달 한편 이상의 글을 『월보』에 실었다. 모두 합하면 170편이 넘는 분량이다. 주목할만한 점은 다른 글들은 대개 국학문 혼용체인데 오지영 만큼은 처음부터 ‘순 한글’을 고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한글주의의 입장은 오지영이 천도교의 천명(天名)을 ‘하ᄂᆞᆯ’에서 ‘한울’로 변경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1911년 6월호 『월보』에서 오지영은 이종일과 함께 ‘한을(님)’이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한다. 처음으로 ‘하ᄂᆞᆯ’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912년부터는 ‘한울’과 ‘한우님’을 쓰기 시작했고, 1912년 4월호부터는 ‘한울님’ 개념도 아주 간헐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다가 마침내 1920년 4월이 되면 오지영이 ‘한울님’ 개념을 전면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이 ‘한울님’ 표기를 쓰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천도교의 ‘한울님’이 드디어 정착된 것이다. 그 장본인은 오지영이었고, 그 시기는 1920년 4월이었다. 이 당시에 천도교에서 오지영의 위상을 말해주는 장면이다.

 


천도교 혁신운동의 근거지, 익산


                 오지영, 〈기도와 감응〉, 《천도교회월보》 제110호, 1919년 10월호


오지영은 언어적으로는 한글을 고집했지만, 사상적으로는 혁신을 지향했다. ‘한울님’ 개념을 정착시킨 1920년에 그는 천도교 혁신파를 표방한 ‘천도교연합회’ 창설을 주도하였다. 이 해에 익산에도 ‘천도교청년회 익산지회’가 설립되었다. 이듬해인 1921년 7월 3일에는 이리천도교청년회의 초대로 이리에 와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이날 사회는 ‘회장 임종환(林宗桓)’이 맡았다고 한다(1921년 7월 10일자《동아일보》4면〈이리천도교회 설교〉). 임종환은 1922년부터 익산지역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한 인물인데, 이 당시에는 이리천도교청년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이상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오지영이 주도하는 천도교 혁신운동의 근거지는 익산이었고, 그 핵심 인물은 임종환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1920년대 초에 익산에서 천도교 세력이 강성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로 ‘오지영’이라는 요소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1920년대의 익산은 전북 지역 천도교의 ‘총본영’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인물로 오지영과 관련이 깊은 임종환의 존재를 들 수 있다. 이명진과 원도연은 “임종환이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고 사회주의자로서 활동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토대는 천도교 혁신파의 영향이 있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1925년, ‘마침내’ 오지영은 익산의 천도교 혁신파 230명을 이끌고 만주로 이상촌을 건설하러 떠난다. 이 사건은 익산에서의 천도교 교세를 약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10년간의 실험을 한 뒤, 1935년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새사람과 새한울』과 『동학사』와 같은 저술 작업에 몰두한다. 오지영은 82세가 되는 1949년, 사고로 허리를 다쳐 익산으로 귀향한다. 이듬해인 1950년 3월 1일, 천도교연합회 동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함열에서 영면하였다. 

 

글쓴이 조성환(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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