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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상 특별기고> 백제의 솥 익산
  • 편집국 기자
  • 등록 2022-08-25 11:52:47
  • 수정 2022-08-25 11:5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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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라 삼부자집

폭염 속에 여러 작가와 함께 익산의 여기저기를 다녔다. 함라에 있는 삼부자의 고택을 보면서 어둡고 우울한 먼지와 문화재가 되어버린 옛 삶의 추억을 보았다. 언젠가 사람이 살았다는 이야기는 공허했다. 새 삶이 없는 박제된 옛 삶의 이야기는 지루했다. 한 때, 엄청난 부자로 살았다는, 먼 조상들의 찬란한 생활을 이야기하는 늙은 후손의 자부심에 대해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늙은 후손처럼 삭아가는 고댁(古宅)은 걸레질 흔적이 없는 마루처럼 우중충했다.

스물다섯의 어느 봄날 자정이 넘은 시각에 나는 전주 덕진의 어느 자취방에서 문득 길을 나섰다. 이리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나’라는 인간의 존재적 거점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고향이 없는 인간이었다. 어떤 연고도 없는 도시의 대학에 진학하고, 삶과 문학에 대해 몸부림치는 연약한 청년이었다. 짬뽕 한 그릇에 대여섯 병의 소주를 마시던 대학 앞 중국집의 어둑한 뒷방이 내겐 강의실이었고 광장이었고 청춘의 광기였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내겐 존재의 거점도 지상의 거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해 봄밤의 이리를 향해 내디딘 발걸음은 결국 운명이 되었다. 그리고 운명의 비극적 변증이 시작되었다. 

 

김병순 고택의 안채 마루에 앉아 나는, 운명에 대해 혹은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해 어떤 고군분투를 맞이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존재해야 할 자리, 내 운명의 원점을 파고 들어가면 내 의식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중앙시장의 수도식당이며 창인동 성당, 이리경찰서에서 대한서림으로 이어지는 뒷길, 작은 자매의 집의 뇌성마비 장애인들과 문정현 신부님, 쌍방울 빤스공장과 눅눅하고 냄새나는 굴다리를 지나 조심스럽게 드나들었던 송학동의 어느 문칸방, 후레아패션의 여공들, 애인의 뒤를 따라다니던 형사들,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해 토론하던 마동의 작은 방, 황토서점과 울면서 익산을 떠나 마산의 현장으로 떠나던 후배까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일을 나는 익산에서 겪었다. 

 

함라 삼부자집을 나와 왕궁을 거쳐 미륵사지로 왔다. 익산에 살면서 자주 왔던 곳이다. 2016년에 미륵사 서탑을 유화로 그린 적이 있을 정도다. 익산은 미륵의 거점이었다. 금산사 미륵전에 가면, 거대한 미륵불이 솥 위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미륵은 어찌하여 솥 위에 서 있을까? 

 

# 백제의 솥 익산

주역 50 정(鼎)괘는 화풍정(火風鼎)이다. 첫 마디가 ‘혁(革)은 옛 것을 버리는 것이요, 정(鼎)은 새 것을 취하는 것(革去故而鼎取新)’이다. 시인 김지하는 “옛 삶은 끝이 났고 / 새 삶은 시작되지 않았다”며 뼈 아픈 고백을 한 적이 있다. 김지하는 70년대의 옛 삶을 끝내고 생명사상의 새 삶을 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생명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솥(鼎)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솥이 없는 생명사상을 추구하다가 반생명의 길로 들어선 혐의를 지우지 못하고 김지하는 세상을 떠났다. 

솥은 뭇 생명의 근원이다. 가운데를 비워놓고 생명을 길러낼 새로운 사물을 기다리고 있는 게 솥의 본질이다. 미륵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미륵은 솥에서 태어나는 존재다. 그러기에 유학에서는 솥을 왕권의 상징으로 여긴다. 경복궁 근정전 네 귀퉁이에 솥이 놓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만백성을 먹여 살리는 솥, 거기서 태어난 미륵불을 위해 무왕은 미륵사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무왕은 익산이 백제의 솥이길 원했다. 그러나 익산에 솥이 들어온 건 너무나 긴 기다림 끝에, 모두가 지치고 황폐해졌을 때였다.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鼎山)종사는 망국의 시대가 한창일 때에야 익산에 도착했다. 그들이 무왕 시절에 익산에 솥을 가지고 왔다면, 익산은 명실상부한 백제 중흥의 수도가 되었을 터였다. 

 

# 사실과 진실 사이

미륵사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은 사실과 진실의 변증법적 상상을 불러왔다. 기록에 의하면 미륵사를 건립하게 한 왕후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좌평 사택덕적의 딸이었다. 사택 씨는 무왕 시대 백제의 최고 귀족가문이었다. 당연히 미륵사 건립의 재정을 모두 떠안았을 것이고 건축을 직접 지휘했을 것이다. 설계에서 사리장엄의 기록에 이르기까지 좌평 사택의 의도가 철저하게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설사 선화공주가 정식 왕비였다고 하더라도, 무왕에게 보고가 끝났다 하더라도, 최종단계에서 문장은 얼마든지 편집되고 수정될 수 있다. 

그런데 사리장엄에서 역사적 기록이 발견되기 전까지, 저 삼국유사로부터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선화공주는 어쩌란 말인가? 역사적 고증과 가설에 의하면, 선화공주가 무왕의 정식 아내가 될 여지는 완벽하게 불가능했다. 신라 진평왕에게 정식으로 기록된 딸은 둘 뿐이었다. 선화공주는 진평왕의 호적에 올라있지 않았다. 무왕도 마찬가지로 선왕의 적자로 기록될 수 없는 존재였다. 

사리장엄을 보면서 언제 어디서나 인간의 욕망은 존재했었고, 슬픔과 상처가 넘쳐났으며, 저마다의 운명에 드리운 밝힐 수 없는 온갖 내력과 숨기고 싶은 기억들이 저 작은 호리병 속에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작가로서 나는 사실과 진실 사이의 거리에 대해 늘 상상하곤 했다. 익산은 무엇이든 조금 부족한 느낌이 드는 도시다. 완결되고 충만한 느낌이 없는 어떤 결핍이 느껴질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그 결핍이 내 존재의 거점이 아닌가 하고……. 

                                                                                     

정도상 소설가

출생
1960년 1월 3일, 경남 함양군
나이
63세 (만 62세)
소속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상임부이사장
데뷔
1987년 단편소설 '십오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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