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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유배지에서 꽃피운 허균의 ‘도문대작’
  • 편집국 기자
  • 등록 2023-10-16 10:2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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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이자 허난설헌의 누이인 허균(1569년~1618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1610년(광해군 2년) 10월 전시(殿試)의 대독관의 한 사람이 되어 과거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조카와 조카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혐의로 사헌부에서 탄핵당하였다. 그해 12월 익산군 함열현으로 유배됐다. 함열은 현재 함라를 가리킨다. 


그는 유배지에서 학동들을 데려다 가르치는 한편, 글을 써서 1611년(광해군 3년) 문집 ‘성소부부고’ 64권을 엮었다. 그가 칩거하면서 그동안 저술한 시와 산문들을 모아 시부·부부·문부·설부 등 4부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이 책의 끝부분 설부는 다시 ‘지소록’, ‘시화’, ‘도문대작(屠門大嚼)’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수록해 놓았다. ‘성소부부고’는 허균이 스스로 편집하였고, 체재에서 참신성으로 후대 문집에 좋은 모범이 되었다.


‘성소부부고’ 26권에는 ‘도문대작’이 수록돼 있다. 도문대작이란 푸줏간 앞을 지나가면서 입맛을 다신다는 뜻이다. 이는 실제로 먹지는 못하고 먹고 싶어서 먹는 흉내만을 내는 것으로 자족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허균이 ‘도문대작’을 저술하게 된 배경을 서문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이 1984년에 역한 것을 옮겨 왔다. 


“내가 죄를 짓고 바닷가로 유배되었을 적에 쌀겨마저도 부족하여 밥상에 오르는 것은 상한 생선이나 감자ㆍ들미나리 등이었고 그것도 끼니마다 먹지 못하여 굶주린 배로 밤을 지새울 때면 언제나 지난날 산해진미도 물리도록 먹어 싫어하던 때를 생각하고 침을 삼키곤 하였다. 다시 한번 먹어보고 싶었지만, 하늘나라 서왕모(西王母)의 복숭아처럼 까마득하니, 천도복숭아를 훔쳐 먹은 동방삭이 아닌 바에야 어떻게 훔쳐 먹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종류별로 나열하여 기록해 놓고 가끔 보면서 한 점의 고기로 여기기로 하였다. 쓰기를 마치고 나서 『도문대작』이라 하여 먹는 것에 너무 사치하고 절약할 줄 모르는 세속의 현달한 자들에게 부귀영화는 이처럼 무상할 뿐이라는 것을 경계하고자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음식 품평서 또는 평론서인 ‘도문대작’에는 떡, 과실, 고기, 수산물, 채소 등 종류로 나누어 170여 가지 식재료를 기록해 놓았다. 허균은 “벼슬길에 나선 뒤로는 남북으로 전전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나는 별미를 모두 먹어볼 수 있었다.”라고 했다. 이 책은 그가 전국을 다니며 음식을 직접 먹어보고 식감을 기록한 것이라서 사실적이다. 그는 방풍죽에 대해서 “다 끓으면 찬 사기그릇에 담아 뜨뜻할 때 먹는데 달콤한 향기가 입에 가득하여 3일 동안은 가시지 않는다. 세속에서는 참으로 상품의 진미이다.”라고 극찬했다. 실로 우리 음식 문화의 실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기록이라 할 수 있겠다. 


허균은 “우리나라는 외진 곳에 있기는 하지만 바다로 둘러싸였고 높은 산이 솟아 물산이 풍부하다. 만일 하씨나 위씨 두 사람의 예를 따라 명칭을 바꾸어 구분한다면, 아마 역시 만의 수는 될 것이다.”라고 했다. 당시 조선시대와 오늘날 지방의 식재료 변화를 살필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조선은 유교 질서가 엄격한 사회였다. 선비가 음식에 관한 책을 남긴 경우는 흔치 않다. 하지만 풍운아 허균은 사회통념을 깨트렸고 그 이유를 서문에서 이렇게 솔직하게 표현하였다.


“먹는 것과 성욕은 사람의 본성이다. 더구나 먹는 것은 생명에 관계되는 것이다. 선현들이 먹는 것을 바치는 자를 천하게 여겼지만, 그것은 먹는 것만을 탐하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를 지적한 것이지 어떻게 먹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것이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팔진미의 등급을 ‘예경’에 기록했으며, 맹자가 생선과 웅장(熊掌)의 구분을 했겠는가.”


‘도문대작’은 허균이 익산 함열현 유배지에서 저술하였다. 그는 서문 끝에 “신해년(1611, 광해군3) 4월 21일 성성거사는 쓴다.”라고 했다. 함열현 유배 시절과 정확히 일치한다. 유배지가 바닷가라 했다. 아마도 함라산 너머에 금강이 있었기에 지칭한 듯하다. 허균이 유배지에서 꽃피운 음식백과사전인 ‘도문대작’은 맛과 멋의 고장인 전라도라서 그 의미가 사뭇 남다르다. 허균은 역모 혐의로 능지처참형을 당한 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복권이 되지 못하였으며 그 책도 잊혀졌다. 그의 호가 교산(蛟山)이다. 교(蛟)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말한다. 강진의 다산 정약용, 부안 반계 유형원 등은 유배지에서 유배문화를 꽃피웠다. 조선 천재 선비 허균도 익산시 함라에서 용의 부활을 꿈꾸어 본다.


글쓴이 

채수훈<익산시 위생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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